• [제주in&人] 제주의 수선화를 사랑했던 서예가 추사 김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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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한지숙 자유기고가
  • 17.07.13 08:4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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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수선화를 사랑했던 서예가 추사 김정희

 

 

 

추사 김정희(1786~1856)는 경주 김씨 집안에서 병조판서를 지낸 아버지 노경과 어머니 기계 유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그는 추사체란 독특한 글씨체를 만든 인물이다. 글씨, 서예, 그림뿐만 아니라 청나라 고증학을 기반으로 한 금석학자이며 실사구시, 불교학 등에도 조예가 깊은 조선후기 학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이런 학문적 예술적 성과는 결코 우연히 나타난 결과물이 아니었다. 과천에서 말년을 보내던 추사 김정희가 친구 권돈인에게 보내었던 편지에 제 글씨는 비록 말할 것도 못되지만 70년 동안 벼루 열 개를 갈아 구멍을 내고 천 자루의 붓을 닳게 했습니다라는 내용만 봐도 그가 평소에 얼마나 노력파였는지 잘 알 수 있다.

 

추사의 증조할아버지가 영조의 사위가 되어 53칸짜리 집을 하사받고 경주김씨는 훈척가문이 되었다. 추사가 24세에 문과에 급제하자 조정에서 축하를 할 정도로 그의 가문은 당시 세도가의 집안이었다. 아버지는 이조판서, 추사는 병조참판 등 관직에 오르며 부유한 집안에서 젊은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도 시련은 어김없이 닥쳤다.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었다하여 사형을 면하기 어려운 지경이었으나 당시 우의정 조인영의 간청으로 겨우 목숨을 건져 대역죄인이나 유배되었던 제주로 유배를 당하게 된 것이다.

도저히 못살겠다는 뜻으로 불리던 못살포가 현재의 모슬포가 된 대정읍, 바로 그 곳이 추사 김정희가 1840년부터 귀향했던 곳이다. 추사는 그 때의 첫 느낌을 7언절구 시로 풀어냈다.

 

마을 안 아이들이 나를 바라보고는/ 귀양살이 신하의 얼굴 가증도 하지/ 마침내 죽을 고비 넘어서 다다른 곳/ 남국에 미친 은혜 파도도 잔잔해

 

유배지의 제한된 공간에서 생활하며 철저히 갇힌 가혹한 형벌 속에서 그가 겪어야 했던 인고의 세월과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생이별 중에 당한 부인의 죽음에 대한 슬픔은 추사의 글 부인예안이씨애절문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이 제주의 유배시기를 통해 고통을 견디며 절제하여 높은 경지에 다다른 그림과 글씨, 학문이 탄생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추운 겨울이 되어서야 비로소 소나무와 잣나무의 시들지 않음을 안다는 깨달음의 세한도는 바로 이 때 완성된 작품이다.

 

 

 

1844년 귀양살이 하고 있는 자신을 잊지 않고 중국에서 책을 구해다준 친구에게 그의 인품을 소나무와 잣나무의 지조에 비유하여 그려준 것이다. 노송 한 그루와 잣나무 세 그루, 그리고 집 한 채가 그려져 있는 세한도는 최소한의 붓선과 여백으로 모진 세월을 견뎌내고 있는 외로운 선비의 지조를 잘 드러내어 문인화의 백미로 일컬어지고 있다.

 

이곳에는 김정희 자신의 발문과 오세창, 정인보 등 22명의 명사들의 예찬글이 함께 쓰여져 있다. 이는 추사 마니아였던 일본인 후지츠카가 소장하고 있던 것을 서예가 손재형이 어렵게 부탁하여 한국에 오게 되었고 현재 국보 180호로 지정되어 있다. 추사는 그림뿐만 아니라 유배 중에 글씨도 많이 남겼는데 대정향교 동재의 의문당’, ‘영혜사’, ‘송죽사등의 제액(題額)과 제주의녀 김만덕을 기리는 은광연세등이 그것이다.

 

추사는 9년간의 유배생활을 마치고 마침내 제주를 떠나 서울 용산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권돈인의 일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또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를 당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유배에서 돌아와 그가 생을 마감하는 185610월까지 머무르게 된 곳이 과천의 과지초당이다.

 

4년여의 시간은 추사 김정희에게 있어 생을 정리하며 마지막 예술혼을 불태웠던 기간이라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그려진 불이선란도는 추사의 원숙미를 고스란히 드러낸 작품으로 후세에 평가되고 있다. 또한 그가 죽음을 3일 앞두고 쓴 것으로 알려진 현판 판전은 봉은사에 걸려있는데 말년의 청정무구한 심상과 한 점 속된 기운이 없는 글씨등으로 평가 되고 있다. 제주에서의 살아생전, 보리파종 때 아무렇게나 뽑혀 버려지던 수선화를 유난히 좋아했다던 추사 김정희. 그가 나고 자란 추사고택에 가보면 곳곳에 백송과 수선화가 심겨져있어 고매한 선비의 숨결을 느낄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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